김신이야기

독립운동 애국지사이며
김신 장군의 숭고한 나라사랑

독립운동가 아들의 삶

김신은 1922년에 중국 상하이에서 백범 김구와 최준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 김구는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이었다.

아버지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다녔고, 어머니는 김신이 2살 때에 돌아가셔서 형과 함께 할머니 손에 자랐으며, 늘 궁핍한 생활에 시달렸다. 더구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국과 협력하여 항일전을 벌이면서 난징, 창사, 충칭 등지로 옮겨 다녀야 했던 까닭에 임시정부의 가족들도 유랑생활을 하여야 했고, 그때 겪은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를 낳을 당시 어머니는 극도로 쇠약한 상태였다. 할머니는 안그래도 몸이 약한 며느리가 출산을 하게 되니 안쓰러운 마음 그지없고, 며느리 그러니까 내 어머니는 늙으신 시어머니가 일하시는 모습에 송구한 마음 그지없었다. 할머니 손을 덜어 드리고자 어머니는 산후 조리도 채 끝나지 않은 몸으로 손수 세숫물을 들고 계단을 내려오셨는데 이때 그만 계단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이 사고로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폐를 찔렀고, 어머니는 급히 상하이 훙커우에 있는 외국계 폐병원에 입원하셨다. 그즈음 어머니는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저 아이는 어머님이 못 기릅니다. 고아원에 보내야겠어요.”

1924년 1월 1일 할머니와 김순애(김규식 선생의 부인)여사가 형님과 나를 데리고 급히 병원에 갔지만 어머니는 이미 숨을 거두신 상태였다.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아들을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셨다. 마지막 순간 어머니의 절절한 마음을 그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홍커우는 일본인 지역이여서 아버지는 병원을 방문하기가 어려웠다.
당시 나는 어머니 말씀대로 중국의 고아원에 보내졌고, 이후로도 두 차례 더 보내졌다. 할머니는 그때마다 기회를 봐서 나를 집으로 데려오셨다. 내가 고아 신세를 면한 것은 전적으로 할머니 덕이다.

우리가 상하이 융칭팡에 살 때, 마을 뒤편에 쓰레기장이 있 었다. 할머니는 낮에는 차마 가지 못하고 밤에 나가 쓰레기를 뒤지셨다. 쓰레기 가운데 중국 사람들이 채소를 다듬다가 버린 찌꺼기가 있었다. 할머니는 그 찌꺼기를 모아다가 소금에 절여 음식을 만드셨다. 살기 위해서는, 아니 일본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힘들게 생활을 꾸리던 할머니는 귀국하기로 결심하셨다. 그런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황해도 안악에 아는 분이계셨기 때문이다. 안악은 우리 식구가 상하이로 옮겨 오기 전에 정착 했던 곳이기도 했고, 아버지와 교분이 있는 김홍량, 김용진, 김용제 등 김씨 집안의 큰 영향력을 지닌 곳이었다. 내가 할머니를 따라 국내로 돌아온 것은 1925년 11월경, 네 살 때였다. 이렇게 귀국해 안악에 살면서 할머니는 자주 눈물을 흘리셨다.

"지금 네 형은 상하이 어느 구석에 있는지, 밥이나 제대로 먹는지.... 밥이 넘어가질 않는구나...”

결국 할머니는 당신께서 큰손자를 키우겠다고 아버지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셨다. 마침내 1927년 9월 형님도 안악으로 왔다.

1934년 4월 나와 형, 그리고 할머니가 국내에서 탈출해 몸을 숨긴 곳도 자싱[嘉興]이었다. 우리가 도착하고 얼마 안 있어 아버지가 할머니와 나를 만나러 난징[南京]에서 오셨다. 형님은 우리와 같이 자싱에 왔다가 바로 난징으로 가서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찾아오셨을 때는 나와 할머니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찾아오자 할머니는 급하게 나를 부르셨다. 아버지를 다시 뵙는 날이 9년 만에 온 것이다. 내가 겨우 걸음마를 뗄 무렵 헤어졌기 때문에, 태어나서 아버지와 처음 대면하는 순간 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계시는 방으로 들어갔다. 얼굴이 검고 검버섯도 좀 피어 있는 사람이 서 있었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씀하셨다. "이놈, 많이 컸구나!" 태어나자마자 엄마라는 말보다 아버지라는 말보다 할머니라는 말을 가장 먼저 배워야 했던 나의 운명. 가족간에 누려야 하는 따스한 감정마저 좀처럼 누리거나 드러낼 기회가 없는 운명. 개인적인 고충은 철저히 숨기고 욕망도 억눌러야 하는 독립운동 가와 그 가족들의 운명. 그것은 너무도 가혹했다. - 조국의 하늘을 날다 - 중에서

창공에 띄운 민족의 꿈

김신은 황해도 안신학교 재학시절 평양으로 떠난 수학여행에서 펄럭이는 머플러에 커다란 안경을 쓴 비행사의 비행 모습을 보고 비행사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할머니, 형님과 함께 아버지가 계신 중국으로 다시 온 김신은 충칭 칭무관의 중앙대학 부속 고급중학을 졸업하고 서남연합대학(베이징대, 칭화대, 난카이대 3개 대학의 전시 연합대학)에 입학하고, 점차 일제와의 전쟁이 격렬해지자 1944년 쿤밍의 중국 공군군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이곳에서 동료들과 함께 6개월간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후 인도의 라호르로 건너가 초등 비행훈련을 받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마침내 전쟁이 끝났다.
김신은 조국의 해방을 맞아 아버지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았다. 아들을 곁에 두는 것보다는 대한민국의 젊은 인재로 성장해 줄 것을 바랐기 때문이었다.

“작은 아들 신이는 중국의 군인인 동시에 미국의 비행장교다.
그는 장차 우리나라의 군인이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백범일지』 중에서



그 후 김신은 1946년 미국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의 랜돌프 공군기지에 입학하여 비행훈련을 받았고, 1948년 6월,랜돌프 비행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으로 돌아와 같은 해 8월에 난징에 있는 중국 공군군관학교를 졸업했다.

서남연합대학에 다닐 때는 빈대와 이 때문에 고생했고, 장티푸스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다가 머리카락과 눈썹이 빠지면서거의 죽다가 살아났다.

장티푸스를 치료하고 충칭으로 돌아와 몇 달을 보내고 나서 공군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나는 쿤밍의 공군군관학교에 들어갔다. 쿤밍 비행장에서는 비행을 위한 훈련을 별도로 받지 않고, 기초 군사 훈련만 6개월 가까이 받았다.

조종사가 되기 위한 꿈은 생각보다 더디게 이루어져 갔지만, 흔들린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 조국의 하늘을 날다 – 중에서

김신은 1948년 대한민국 육군항공대에 입대했다. 이듬해 1949년 10월 1일 창설된 한국 공군의 초대 멤버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 때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면서 한국 공군의 위상을 드높였고, 1960년에 제6대 공군참모총장으로 취임했다. 1961년 한국의 공군참모총장 자격으로 중화민국 총통부를 방문했다.

 ‘김구 선생의 영식인 김신 군은 상하이를 거쳐 미국 배편으로 부산에 상륙해 2일 하오 8시 5분 서울역 도착. 김신 군은 중국 쿤밍 군관 학교에서 수학, 인도로 넘어간 뒤 미국으로 가서 텍사스 주에 있는 항공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오는 길이라 한다. 군은 다음과 같이 감상을 말한다.

  “13년 만에 고국에 돌아오는 기쁨과 감격을 무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오래 외국에 있었기 때문에 언어가 마음대로 통하지 않아서 자세한 말을 단시간에 하기 어려우나, 연로하신 아버지를 모시고 건국을 위해 일하려고 합니다.

배운 것이 항공 기술이니만큼 조선의 항공 국방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동아일보』 1947년 9월 4일자 기사

군인의 삶

김신은 귀국 후 경교장에 머물면서 이때에 비로소 아버지와 함께 한 상에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1948년이 되자 국내 사정이 매우 복잡해졌다. 민족의 분단과 전쟁을 막기 위해 백범 김구는 북측에 남북협상을 제의하고 1948년 4월 19일 평양으로 향했다. 당시 김신도 아버지를 보좌하여 동행하였다. 그러나 남과 북은 각각의 정부를 수립하였고 아버지는 1949년 6월 26일 친일파와 반통일 세력의 하수인 안두희의 흉탄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점점 조국의 현실은 어두워지기만 하였다.

 1947년 9월 2일 한밤 중에 서울에 도착해 경교장을 찾아갔다. 아버지와 만난 다음 날 평생 처음으로 아버지와 겸상을 했다. '아! 이런 날이 다 오는구나!' 기쁘고 또 기쁘면서,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했다.

 1934년 중국으로 탈출했으니 13년만의 귀국이었다. 13년만에 조국 땅을 밟으니 내게는 뭐든지 예뻐 보였다. 한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아, 우리 동포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이 신기하면서도 기쁜 마음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어르신들이 그렇게 자랑하시던 금수강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산이란 산의 나무는 온통 베어져 헐벗은 모습이었고, 사람들도 헐벗고 굶주려 보였다. 해방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아버지의 방북을 두고 여러 말들이 많은 것을 나는 안다. 당시의 정세나 현실과 동떨어진 지나치게 이상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방북이었다느니, 김일성에게 이용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순진한 발상이었다느니, 그밖에도 이런저런 의견이 분분 하다. 나는 당시 아버지를 모시고 북한을 다녀온 사람으로서 그런 의견 하나하나에 일일이 췌언(贅言, 쓸데없는 설명)을 더할 생각이 없다.

 다만, 『논어』에 나오는 이런 구절을 새삼 떠올려 본다. “知其不可爲而爲之(지기불가위이위지)” 풀이하자면 '그 아니될 것을 알면서도 해내고자 끝내 노력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이루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 줄 알면서도 인(仁)과 예(禮)에 바탕을 둔 세상을 만들고자 분투한 공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의 성패(成敗)를 이리저리 따져 보고 자신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를 계산하며 진퇴를 가늠하는 따위의 행태는 내 아버지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민족의 화해와 통일이라는 과제에 대하여, 민족의 분단과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과제에 대하여 나의 아버지는 결코 뒤로 물러서려 하지 않으셨다. 현실의 유불리, 조건과 상황의 굴곡을 아버지도 그 누구 못지 않게 파악하고 계셨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물러설 곳을 두지 않으셨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며 실천을 다하셨을 뿐이다.

 그 진심(盡心)의 깊이를 시세(時勢)의 잔물결로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고 했던가. 갈증에서 화해로, 분단에서 통이로 향하는 거대하고 깊은 역사의 흐름이 이어질 것임을, 또한 우리 모두다 이어 나가야 할 것임을 아버지는 깨닫고 계셨다. - 조국의 하늘을 날다 – 중에서

38선이 굳어져 가면서 아버지를 비롯한 임시정부 사람들은 어떻게든 남과 북을 하나로 합쳐 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아버지는 공산당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계셨다. 그러나 중국에서 같은 민족이 공산당과 국민당으로 나뉘어 싸우는 비극을 목격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아 보고자 했던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암살 계획을 서북청년단의 한 젊은이가 대광중학 교감 박동엽 선생에게 알렸다.박동엽 선생은 이것을 김승학 선생에게 알렸다. 김승학 선생은 “백범, 위험합니다. 간악한 무리들이 암살 계획을 세워다지 않습니까? 잠시 해외라도 나가 계셔야겠어요.” “괜한 소리 마시오, 어떻게 찾은 나라인데 내가 조국을 떠난단 말입니까.” 나도 큰 걱정을 안고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아버님, 지금 상황이 좋지 않으니 잠시 병원에 입원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요지부동이었다. “내 평생 그런거 무서워한 적 없다. 내일 목이 꺽이더라도 할 일은 하겠다.”

 다음 날 나는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을 수행하게 됐다. 위원단은 옹진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등 분쟁이 끊이지 않자 유엔에서 실태조사차 파견한 위원단이었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유엔임시 위원단을 수행해 현지조사를 하러 갔다. 현지에 도착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통역관이 나를 급하게 찾았다. 서울에서 긴급한 일이 벌어진 것 같으니 빨리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아이코! 기어이 일이 터지고 말았구나!'

 경교장에 도착해 2층으로 올라갔다. 아버지의 시신이 모셔져 있었다. 조문객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정부는 상여가 나가는 날 폭동이 일어날까 두려워 상여를 호위하는 경찰들에게 권총을 지급했다. 그리고 주요 지점마다 장갑차를 배치했다. 서울역 쪽에는 장전한 기관총을 장착한 장갑차를 배치했다. 계엄령 선포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방에서 영결식에 참가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올라 오는데, 중간에서 가로막기까지 했다.
 

아버지 기일인 6월 26일이 다가와 제사 준비를 하기 위해 나는 1950년 6월 25일 장인어른과 아내, 그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인천으로 차를 몰았다. 그런데 운전 조수로 있던 김시열이 인천까지 나를 찾아와서 전쟁이 났다고 급보를 전했다. 전쟁이 났으니 집합하라고 공군 본부에서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나는 즉시 여의도 비행장으로 갔다. 북한 야크 전투기 두대가 격납고와 활주로를 공격 하고 있었다. 당시 공군 참모총장 김정렬 장군은 미군으로 부터 F-51 무스탕 전투기를 인수하기 위해 나를 포함한 열한명의 조종사를 일본 후쿠오카의 이타즈케 미 공군기지로 보냈다. 미군 전투기를 제대로 조종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몇 달은 훈련을 해야 하지만 불과 일주일, 그것도 실제 훈련은 나흘 정도만 받고 실전에 투입되었다.

 전쟁 기간에 겪은 많은 일들이 가슴 아픈 기억들로 남아 있지만, 동족상잔의 전쟁 그 자체만큼 가슴을 저며 내는 아픈 기억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나는 공군으로서 많은 작전에 참가해 싸워야 했기 때문에 '내가 동족과 싸우기 위해 비행 기술을 그토록 열심히 익혔단 말인가'하는 비통한 심정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물론 침략한 적을 물리쳐 승리를 거두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며 나는 그러한 본분에 늘 충실했다고 자부한다. - 조국의 하늘을 날다 – 중에서

1950년 6월 25일 아버지의 1주기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 분주하였던 김신은 전쟁이 났으니 공군 본부로 집합하라는 급보를 받고 여의도 비행장으로 갔다. 이후 전쟁이 끝나던 순간까지 남과 북을 오가며 일진일퇴의 공방을 이어갔다.

 김신은 한국전쟁기간동안 승호리 전투 등 우리 공군사에 길이 기억될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그러나 김신은 함께 출격했던 동료들의 침상이 없어지는 것도 고통스러웠지만 동족상잔의 전쟁 그 자체가 고통스러웠다고 회고하였다.

 ‘처음 태극 마크를 단 비행기로 내 조국의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올랐을 때의 벅찬 가슴은 잠시였다. 나는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에 휩싸인 조국의 하늘을 날아야 했다. 자유를 지켜내기 위한 싸움이기는 했지만 내 조국의 산하에 폭격을 해야만 했다. 갖은 고난 속에서 익힌 비행기술을 동족과 싸우는 데 써야만 했던 비극은 나 개인만의 비극은 물론 아니었다. 시대가, 역사가 우리 모두를 그 길로 내몰았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난 뒤 과도정부 아래 이종찬 장군이 국방부 장관이 됐다. 이종찬 장관은 나를 제6대 공군 참모총장에 임명 했다. 이종찬 장관은 이승만 정권 시절 이 대통령과의 마찰로 육군 참모총장직을 사임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내 처지를 잘 이해했던 것이다.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나에 대한 감시나 모함은 사라졌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허정 과도 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다가 과도 정부가 선거를 통해 민주당에게 정권을 넘겼다. 윤보선씨가 대통령이 되고, 장면 씨는 행정권을 이양받아 총리가 됐다. 그런데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권력을 다투는 데 열을 올렸다. 국방부 장관도 자주 바뀌었고, 국군의 중심이라는 육군 참모총장도 여러 번 바뀌었다.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이다 보니 쿠데타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박정희였다.

나는 쿠데타가 일어난 후 육군 본부에 모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육군 본부에 도착하니 혁명군이 때때로 총을 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 하고 있었다. 본부에 들어 갔더니 장도영 장군도 있었고, 각 군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박정희 장군을 처음 봤다. 작은 키에 바짝 마르고 거무죽죽한 피부에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음 쿠데타에 동의했다가 전면에 나서는 것을 거부한 장도영 장군은 나를 따로 불러 의견을 구했다. “젊은 애들이 총을 들이대려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나?” “계급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들은 지금 목숨을 내놓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누가 말한다고 해서 쉽게 말을 들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고 강제로 진압하려 하면 서울 시내가 전쟁터가 될 것입니다. 이것만큼은 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쿠데타가 일어난 이듬해인 1962년 9월 나는 주 중화민국 대사로 부임했다. - 조국의 하늘을 날다 – 중에서

외교관의 삶

김신은 공군참모총장의 임기를 마친 뒤, 1962년 제6대 주 중화민국 대사로 임명되었고, 1970년까지 8년 동안 대사로 재임하면서 한·중 우호협력 증진에 크게 기여했다.

1965년에는 ‘한·중우호조약’ 을 체결함으로써 상호 존중과 신뢰 관계를 공식화했다.

김신 대사는 두 나라가 과거의 우의를 잊지 않고 미래를 위해 함께 손잡고 나갈 것을 바랐다. 과거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해 주었던 중화민국의 여러 인사들을 예방함으로써 항일투쟁의 기억을 공유 하고 미래를 향한 동맹관계의 초석을 다졌다.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에도 적극 발 벗고 나서 장징궈 [ 張經國 ] 와 천치촨 [ 陳啓川 ] 가오슝 [ 高雄 ] 시장의 도움으로 해군 군사기지인 쭤잉 [ 左營 ] 에 한국 교민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김신은 주 중화민국대사로 재임하던 시기는 물론이고 이후 중국대륙과의 국교 수립에도 큰 역할을 하는 등 오랜기간 한·중우호관계의 증진을 위해 노력하여 왔다.

백범김구기념사업회협회장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나 독립운동가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그들이 보여준 의로움과 애국심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고 따르기 위한 삶을 살아왔고, 후대에도 선열들의 애국애족 정신과 대의를 위한 희생 정신을 전달하기 위해 1986년 독립기념관 초대 이사장, 2000년 (사)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노력해 왔다. 또한, 알려지지 않은 독립유공자를 발굴하고 이들을 알리는 데에도 힘써서 이들이 역사에 기억될 수 있도록 힘썼다.

1994년 6월 26일 아버지의 45주기 추모식 때 중국어판 『백범일지』를 고유(告由)할 수 있었다. 중국어판은 한국어 전문가 쉬안 더우[宣德五]·장밍후이[張明惠]씨 부부가 번역하고, 내가 문장과 내용을 감수했다. 1992년부터 중국 측과 교섭에 나서 2년 여 동안 준비한 끝에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출간 당시만 해도 많은 중국인들과 조선족들이 한국의 항일 운동을 북한 집권 세력이 주도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백범일지』 중국어판 출간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대한 중국 내 인식을 바로잡는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와 임시정부, 수많은 우리 독립 운동가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서린 땅이 중국이었기에 출간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는 일이었다. - 조국의 하늘을 날다 – 중에서